'무엇이 순수한가'라고 묻는 것은 순수하지 않다고 규정될 것들을 상대로 배타적인 행위이다. 순수로 돌아가는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순수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린왕자 2015>는 그래서 무엇이 순수한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관객들을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는 것이다. 다만 삶과 순수가 만나는 지점을 3D와 페이퍼의 상이한 애니메이션 형태로 포착해 화해시켰을 뿐이다.


 원작 어린왕자는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욕망들을 가장 순수한 방법으로 은유한 작품이다. 소행성들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욕망들을 은유한 가장 작은 단위, 이를테면 형태소와 같은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영화는 소녀가 생텍쥐페리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이야기 쪽지를 매개로 해서 원작의 은유들을 페이퍼 애니메이션으로 이어간다. 그러니까 3D 애니메이션은 삶의 것, 페이퍼 애니메이션은 순수의 것으로 구성해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소행성의 주인들은 다 큰 어린왕자가 굴뚝청소를 하는 소행성에서 다 함께 만난다.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자면, 이는 여러 욕망들이 하나의 가치로 단일화된 세계인 셈이다. 생텍쥐페리 할아버지의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소녀가 어른이 된 어린왕자를 구출하고 유리벽에 갇힌 별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욕망의 단일화가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삶과 순수가 다시 화해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B-612에 함께 돌아간 어른 어린왕자와 소녀는 왕자의 장미가 삭아 바스라지는 것을 함께 목격하고, 어른 어린왕자는 해가 뜨는 광경에 장미가 깃들어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어린왕자가 된다. 이때의 어린왕자는 3D 어린왕자이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어린왕자를 구출하고 재현해 낸 셈이다.


 다소 오글거리는 대사와 진부한 디테일들은 이 영화의 오리지널 영역인 서사구조의 세련된 연출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순수가 화해하는 지점에서, 진부함과 클래식함이 결탁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by 시적 화자 2015. 12. 26. 17:08

   -진보와 보수의 아버지

 정치, 사회 이슈는 물론 꽤 많은 담론들이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에 의해 변증적으로 양산된다. 신/구의 대립, 전통과 혁신, 효율과 형평 등으로 이 형태는 무한한 확장을 거듭한다. 이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확장의 중심 수도는 대체 어디인가? 근대적 우리들의 관념적 조상, 미국이다.

   -가장 자유로운 나라

 미국은 자유롭다. 그것도 가장 자유롭다. 무려 타국으로부터. 담배 한 갑이 주어진 고등학교 교실에서 일진 A는 가장 자유롭다. 그는 15가지 포즈로 멋을 부려본 뒤 자기 따까리 B에게 5개의 자비를 건넨다. 셔틀 C는 담배를 욕망할 권리조차 거세당한 나머지, A와 B를 속으로 '미래의 폐암환자 짜장셔틀'로 규정하는 오만을 저지른다. 아무튼 C는 내일도 빵을 사온다.

 자유는 모든 경우에 배타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유는 어떤 의미에서 착취이다. 그러나 미국 외 모든 타국에게 있어 자유의 척도는 미국으로부터 얼만큼 벗어났는가인데 반해, 미국에 있어 자유의 척도는 얼마나 많은 국가를 복속시켰는가이다. 하여 미국은 외적 투쟁과 내적 수호의 의미를 한 몸에 지니는 진보/보수의 자웅동체일 수 있다. 오직 자유의 이름으로.

   -착한 사나이

 약골 스티브 로져스는 정의롭고 애국적인 사내이다. 키도 작고 잔별치레도 많치만 영화 시작 전 애국선전에 불만을 갖는 불량배에게 시비를 건다. 신체검사에 번번이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서도 계속 모병에 지원한다. 그 애국심에 탄복한 과학전략부 에스카인 박사는 그를 징병검사에 합격시켜주고 자신의 약물실험으로 슈퍼솔져가 될 사람에 내정한다. 박사는 물었다. "나치를 죽이고 싶나?" 스티브는 말한다. "불량배가 싫습니다." 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가 되고 독일군들은 불량배가 되었다. (슈미트의 '하이드라'도 포함해서)

   -교묘한 동일화

 스티브의 적수가 된 슈미트는 아주 우연히도 괴상한 인간이었다. 그가 과분한 야심가인 것도, 심성이 악랄한 것도 스티브의 정의나 미국의 자유와는 무관한 일이다. 자유 수호는 멋진 이름이지만, 복면 쓴 하이드라 군인은 파란 관선에 산화하여 흔적도 없이 죽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불량배의 표정으로 죽어갔는지는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없었다. 복면과 마크 아래 그들은 나치이고 하이드라이다. 그들이 인간임을 상기시켜주지 않는 한 영화는 역사의 패자인 그들을 얼마든 짓밟을 수 있다. 나는 나치도 인간 집단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변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미국의 적이 나치가 아니라 위구르족이라면, 또는 처음 조우한 외계 지성체라면 뭔가 달라졌을까를 생각해 볼 뿐이다. 이후 스티브가 70년이나 동면한 이유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완벽한 승리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맺으며

 나는 마블이 친미(애국)적인 성향을 가지고 서브리미널 애국주의 메시지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스파이더 맨>에서는 힘과 책임의 역학을 환기시켜주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다만 마블은 미국에 대한 공시적 진단을 하고 있으며 캡틴 아메리카는 2차대전의 미국이다. 성스러운 폭력과 진보적 보수, 혁신적 전통, 효율적 형평성 등 자웅동체의 슈퍼파워를 가진 미국이다. 외부의 도발에 '복수'하는 미국이고, 자신의 나약함을 잊고 불량배들에 화풀이하는 미국이다. A가 된 C이다.

 본 영화의 진짜 미쟝센은 갓 초인이 된 스티브가 하이드라의 첩자를 추적하는 장면이다. 초인의 몸에 맞지 않는 표정으로 그는 주변 엑스트라들을 물리치며 "미안해요"라고 반복했지만, 결국 그가 남의 달리는 차들 위로 방방 뛰어다닌 덕분에 도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by 시적 화자 2015. 12. 21. 22:30

 시사적인 영화가 또 나왔다. 관객은 또 기대한다. 물론 작품에 현실적으로 쓸모있는 함의를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여러모로 단순한 투정에 불과하다. 현실적인 것의 경계가 무엇인지도 애매하고, 무엇이 쓸모있는 이야기인지도 모호하며, 함의가 꼭 필요하다는 전제도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 담고 살아가는 사회에서, 감히 눈길 닿을 수 없는 영역들을 비추는 작품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고발적 성과를 기대하게 된다. 그것이 단지 특정 사회 계층을 소재로써만 채용한 것이든, 또는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든간에 그렇다. 이런 기대가 관객으로서 범하는 죄라고 말한다면, 난 이 죄를 감히 '원죄'라고 부르고자 한다.


영화 <내부자들>.


 <내부자들>은 조폭/검찰/언론의 유착을 가상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결말의 일부로 시작하는 역순행적 서사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그 서사적 비틀림은 이후 있을 반전 서스펜스를 위해 착실히 사용된다. 무려 조폭/검찰/언론을 소재로 하는 만큼, 일반적 시선에서 가능한 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이야기를 꾸려갈 수 있고, 결말의 반전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다면 영화가 주는 시사적 고발의 쾌감을 함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다만 사이다 광고를 보면서 냉수를 마신다고 해도 그것이 사이다를 마신 게 아닌 것처럼, 고발하고 싶은 가상의 존재들을 시원한 반전으로 농락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시원한 고발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언론매체가 사용되는 방식은 아주 단순하게 표현된다. 언론계의 '높으신 분' 이강희가 논설을 쓰고, 신문과 방송 등의 매체로 "일파만파" 퍼져 나가며, 대중은 작중 이강희의 표현 그대로 '개,돼지'처럼 정보를 걸식한다. 그러니 당연히 이강희는 그런 힘을 휘두르며 다른 분야의 '높으신 분'들과 거래하는 자이다. 실제로 대중이 개 돼지가 아닌 세상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초인적 선동능력을 가진 능력자이니 당연히 악인일 수 밖에 없고, 대중이 개,돼지인 세상이라면 이강희는 단지 불쌍한 가축들을 다루는 '정육업자'에 불과한 셈이다. 감독은 실제로 대중을 개,돼지로 여기고 정육업자를 고발하려 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대중은 개,돼지가 아닌데 언론계의 '높으신 분'들은 원래 그런 초인적인 선동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관객은 그런 허술한 고발에 속시원해야 할 이유가 없다.


대중은 개,돼지가 아니고, 한국언론은 조선중앙통신이 아니다.


 '높으신 분'은 모두 나쁜 분이라는 도식에서 꼭 벗어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사회적으로 피해를 주는 모든 요소를 다 알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언제나 적당히 넘겨짚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납득되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얼마나 관객을 피해자의 입장으로 잘 대입시켰는지 하는 것들은 별개의 문제다. 이입이 안 되는 서사는 결국 남의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전제한 사항들을 일단 '그렇다 치고' 보면 괜찮을까. 다시 말하지만 <내부자들>의 서사는 역순행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손을 잃은 안상구의 기자회견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그 긴 이야기의 서스펜스를 마지막까지 유지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반전 서스펜스를 위한 장치인 셈이다. 분명 공략 불가능해 보이는 그 권력의 카르텔을, 납득되는 과정으로 깨부순다는 건 정말 정교한 폭발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잘 짜여진 이중 반전은 그 자신의 전제 안에서는 굉장히 설득력있는 결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사에 충분히 집중했다면, 최소한 시간이 아깝지는 않은 끝맺음이라 하겠다.

 다만 이 영화를 두 번째 보는 관객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미 뻔히 알고 있는 후반의 두 번째 반전을 위해 서사 전체의 긴장을 뒤집어놓은 이 전개가 어떻게 느껴질 것인가. 아마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을 보는 듯할 것이다.


 모든 관객이 같은 영화를 두 번씩 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영화를 '한탕용'으로 만드는 것은 문화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난감한 일이다. 다만 원작이 존재하는 영화이고, 또 원작을 재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러닝타임의 한계 등을 생각한다면 위의 문제점들을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주연들의 연기는 위와 같은 연출 및 개연성의 오점들을 만회하기에 충분했고 아름다웠다. 12월 31일에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라는 이름으로 감독판 개봉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오점들은 영화의 "9등급 성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수우미양가 중 가"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리가 먼 분들이라고 해서 너무 미워하지 말자.

by 시적 화자 2015. 12. 9. 18:28

 미갤탐방


 -자아와 비아의 대결에 대하여 

 -연속적 시간에 대한 불연속적 이해에 대하여




자료 - 미갤 개념글 발문.

원본링크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mystery&no=810550&page=2&exception_mode=recomm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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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보통인 사람이고, 대부분의 여러분 또한 그렇다. 보통 그렇듯이 나 또한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무섭고, 어떤 개인의 강력범죄가 무섭고, 인류의 멸망이 무섭다. 세계는 그런 대부분의 보통사람으로 채워지고, 사람들은 유아기에 겪었던 자아와 비아의 대결을 타인과의 관계맺음으로 종식시키며 사회계약을 체득한다. 


 그게 불가능한 사람들은 어떨까? 음모론자들은 전통적으로 세계 배후에 강력한 비밀세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듯하다. 그들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실관계 입증이 어렵다는 점이다. 그들의 상상 속 비밀세력은 개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기억을 조작하는 일 정도는 우습게 행하기 때문에, 인지와 판단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는 없다. 어떠한 반박도 인지와 판단 내부에서 검증되므로, 그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그들의 상상력을 제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세계의 주인이나 인류의 종말 따위는 일종의 곁가지일 뿐이다. 그들의 가장 주요한 인식체계는 바로 <자아-비아> 양분의 형태이다. '나 아닌 모든 이들이 모두 한패들이다'라는 것. 그리고 종말과 배후세력은 모두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상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을 바로 '사회성 결여' 따위의 증세로 넘겨짚을 생각은 없다. 어떤 사람의 자아와 비아 사이에 불신의 공동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가 사회생활에 장애를 겪어야 할 이유는 없다. 개인의 사회생활은 지극히 객관적인 행동양식만으로도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의식 과잉에 빠진 음모론자들은 우리 사회에 잘만 숨어 산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더 무서운 점이다.




2.

 일기를 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누구라도 하루에 자신에게 있었던 일 모두를 기록할 수는 없다. 우선 어떤 사건이 자신에게 특기할 점인지를 추리는 기억과정에서부터 엄밀한 의미의 '객관성'은 탈락한다. 하루라는 시간의 단위는 연속적으로 흘러갔지만, 기록은 불연속적이고 심지어 몇 가지 사건과 그로 인한 단상에 대해 편집적인 셈이다. 


 그것은 뉴스와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시간은 언제나 연속적이다. 다만 모든 종류의 기록이 불연속적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관심에 따라 어느정도 편집적일 수 밖에 없지만, 비아(자아의 여집합으로서의) 전체가 한 개의 주체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이해방식은 관측되는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엮고 인과를 연결해서 비아 전체를 대변하는 배후세력을 구성하기 딱 좋은 형태이다.




3.

 머릿속에 크툴루나 일루미나티의 거대한 문어같은 게 들러붙어 있다면 빨리 떼는 게 좋다.

by 시적 화자 2014. 10. 29. 17:51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관습적으로 은유하지만, 나는 단지 똥 만드는 함수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정보의 권위가 유실되고 그로 인해 모든 종류의 정보가 밑 빠진 그릇을 빠져나가는 물처럼 소비되며, 네티즌은 만사에 냉소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20세기 화가 잭슨 폴록의 별명처럼,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서 온-오프라인 상의 모든 서사는 'Jack the Dripper'(질질 싸는 잭)이 지배한다.

 이처럼 허무가 팽배한 기조를 타고 각종 지시대명사가 뜬다. 정확히는 不지시대명사다. 거시기(정신분석학의 거시기는 논외로), 아햏햏, 뜌삠삠 등의 단어들은 무엇을 지시하려는 목적도 없이 떠다니는 단어다.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가 닿지 못하고 끝없이 미끄러진다'라고 했지만, 이들 단어들은 기의에 가 닿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행종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는 단어 뿐 아니라, 서사가 해체된다. 무엇을 지시하려는 목적조차 없는 이야기가 뜬다. 60년대 프랑스의 포스트모던스러운 관념적 시도가 아니다. 대중이 보고 즐기는 '유행'이다. 이말년이 주도한, 바로 '병맛'이라는 이름으로.


 본래 병맛이라는 개념은 디씨인사이드 카툰연재 갤러리에 등록된 일부 무성의한 만화들을 분류하는 카테고리로 처음 등장했다가, 이후 서사파괴적인 종류의 만화들을 총칭하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기승전병'방식의 전개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병병병병'으로 전개되는 개막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뜨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병'파트가 가장 중요한 웃음포인트인데, 병맛 만화가 보통의 이야기들처럼 착실히 서사를 구성해나가다 이를 스스로 발작적으로 무너뜨리는 부분이 바로 이 '병'파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사 자체를 無화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착실히 서사를 구성해놓고 그것을 파괴하는 방식이다보니 병맛만화 각 편은 물론이고 병맛코드 자체 또한 특별히 지향하는 바가 없다. '표현'이라는 것은 원관념의 전달을 지향점으로 둔 모든 몸짓들의 총칭이므로 병맛은 애초에 표현조차 아니다. 이말년씨리즈에서 자주 등장하는 <"포기해, 이말년씨리즈 흐름상 다음컷은 와장창이야." "와장창!">, <"좋아, 가자!" "그리고 지구는 멸망했다">등의 결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심지어 이말년씨리즈는 병맛의 구성조차 병맛스럽게 파괴해버린다. 어떤 만화에서는 착실하게 파괴된 서사만을 보여주는가 하면, 또 다른 만화에서는 처음부터 폐허만 남은 옛터같은 서사에서 만화적인 연출력을 동원해 번득이는(그러나 억지스러운, 그래서 더 재밌는) 결론을 이끌어내곤 한다. 특히, 자동차 구매에 앞서 운전의 안전을 걱정하는 손님이 '더 큰 차량일수록 안전하다'는 자동차 딜러의 꾐에 넘어가 25톤 덤프트럭을 구매해서 운전하다가 기차에 치어 죽고 그 다음 컷에 <안전하고 빠른 대중교통을 이용합시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편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 외에 <비둘기지옥>이나 <불타는 버스>편은 병맛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추천해주어야 할 명작이다.


 근대 이전에는 표현이 진리를 향해 투쟁했으나, 현대에는 진리가 스스로 투쟁적인 상태가 되었다. 모든 것이 소비되는 상황에 기의에는 더이상 예전같은 권위가 없고, 이야기는 갈곳을 잃었다. 길이 없는 세상의 중심에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린 이정표, 그것이 이말년씨리즈다.




*'생각없이 그린 만화에 의미를 과하게 부여한다'는 지적은 무의미합니다. 작품은 작가의 자식이고, 부모의 품을 떠난 자식은 부모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by 시적 화자 2013. 12. 10. 15:33

당신이 베어 물 수밖에 없는 가시 돋친 사과 - 
쏜애플(THORNAPPLE)의 <난 자꾸 말을 더듬고 잠드는 법도 잊었네> 리마스터 앨범 

밴드의 리더인 윤성현은 쏜애플의 음악을 ‘20세가 넘어서도 끝나지 않는 사춘기의 노래’라고 했다. 그 말처럼 쏜애플의 데뷔앨범 <난 자꾸 말을 더듬고 잠드는 법도 잊었네>에는 누구나 겪게 되는 10대의 열병과도 같은 ‘나’와, ‘너’ 그리고 ‘소통’에 대한 농밀한 통찰이 담겨있다. 

「오렌지의 시간」에서는 한 인간의 내부에서 펼쳐지는 강박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 파괴의 욕구를,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연상되는 제목의 「빨간 피터」에서는 타자에 의해서만 완성 될 수 있는 라캉적 자아와 코기토의 충돌을 드러낸다. 이렇게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유아적 자아는 「아가미」에서 자신과 동일시했던 타자에게 ‘차라리 이대로 죽어’ 달라는 이기적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너의 무리」 속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자아는 「플랑크톤」에서 닿을 수 없는 의미의 표면을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리는 자신에게 절망하다 비로소 ‘현실에 발을 딛’고 「이유」에 이르러 소통에의 강렬한 욕망을 표현한다. ‘내가 이리 견딜 수 없게 열이 심하게 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끊임없는 자기 인식과 완성의 노력에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한 개체로서는 불완전한 까닭이요, ‘너’ 라는 타자가 없이는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나’는 그 깊은 고독의 골을 넘어 ‘소통’의 행위에 닿기 전에는 완성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미는 비가 와도 운다」의 노랫말처럼 그 소통에의 몸짓은 비록 늦었을 지라도 행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무리 좌절 될 지라도 닿아야만 하는 소통에 대한 갈망은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베어 먹을 수밖에 없는 가시사과―THORNAPPLE을 연상케 한다. 

일관된 주제의식에 비해 앨범의 음악적 스펙트럼은 꽤나 다양하며 그 다양성은 커다란 내용적 주제에 대한 변주다. 포스트 록을 연상케 하는 연주곡 「피어나다」부터 싸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오렌지의 시간」과 공격적인 사운드의 「빨간 피터」, 90년대 브리티쉬 팝의 서정과 우울을 담은 「아가미」, 재즈적인 터치가 느껴지는 콘트라베이스와 몽환적인 신서사이저의 사용이 돋보이는 「도롱뇽」, 일렉트로닉한 「청색증」과 음울한 트립합 사운드의 「플랑크톤」, 동양적인 멜로디 어프로치가 눈에 띄는 「이유」, 청량감 있는 기타 사운드와 독특한 후렴구 멜로디가 돋보이는 「매미는 비가 와도 운다」까지―윤성현은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물음에 ‘다양한 장르적 특성은 좋은 음악을 탄생시키기 위한 질료일 뿐’ 이라고 답한다. 그럼에도 사운드가 일종의 통일감을 가지게 된 점에는 앨범의 믹싱과 프로그래밍을 담당한 베이시스트 심재현의 기여도가 컸다고 하겠다. 

더불어 개성있는 노랫말과 보컬은 쏜애플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생성한다. 개인이 가진 심연 속에 있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듯한 단어들과 일종의 기괴한 문학성마저 느껴지는 문장들은 중성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윤성현의 보컬로 인해 생명력을 얻는다. 때로는 무너지는 텍스쳐를 만들어내고, 때로는 확장되는 공간감으로 압도하는 실험적 기타사운드 또한 일품이다. 안정적인 리듬파트의 앙상블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한 가지 더 이 앨범의 강점을 말하자면, 수려한 멜로디가 가지고 있는 힘의 측면을 들 수 있겠다. 전 곡 모두 훌륭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어 모두 싱글 컷을 해도 무색할 지경이다. 이토록 고심하여 뽑아낸 양질의 멜로디를 탐닉하는 것은 청자의 큰 기쁨임에 틀림없다.

2010년 7월 발매된 이 앨범은 주축 멤버였던 윤성현과 심재현의 입대로 인해 일절의 홍보나 공연활동을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이 체 제대하기도 전에 절판되어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인디씬에서 조차 이례적인 일인데, 홍보나 포장 따위의 소위 ‘뮤직 비즈니스’ 보다 문자 그대로의 ‘좋은 노래’의 힘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 해 본다. 

이번에 발매된 리마스터 앨범은 당시 아쉬웠던 마스터링의 문제를 해결하여 한결 고취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모든 파트의 악기의 해상도가 현저하게 향상 되었고, 소위 말하는 ‘댐핑감’또한 훌륭하다. 초판의 아트웍을 담당했고 다시금 리패키징을 담당해준 권대훈(WhiteYak)의 24페이지 분량의 한층 밀도 있어진 아트웍도 눈여겨 볼만 하다. 초판 발매 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한 목마름 때문인지 2013년 1월 현재 쏜애플은 새로운 기타리스트 한승찬과 함께 맹렬한 기세로 공연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리마스터 앨범 발매와 더불어, 이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가시가 잔뜩 돋친 이 사과의 과육(u
;)은 달콤하다. 입술이 찢어지고 혀가 찔리더라도 충분히 베어 물 가치가 있다. 

<네이버 앨범평>






차후 가사의 문학적 해석들과 겸하여 글을 작성할 계획입니다

by 시적 화자 2013. 10. 21. 16:47

한 줄뿐인 목차


<색채가…>의 목차는 단 1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도 서명과 동일한 제목이다. 서사가 골목을 돌 때는 숫자만 하나씩 붙인다. 그렇게 쉬지 않고 총 열아홉 번 꺾어지는 이야기이다. 20대 시절과 현재를 넘나들며 역순행적으로 서사를 풀어간다.

흔히 이러한 역순행적 구성의 서사를 통틀어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엄밀히 말해 다자키 쓰쿠루의 의식은 고여 있다. 모든 서술은 과거의 어떤 한 시점으로부터 시간축 방향으로 뻗은 방사형의 생각들이다. 자신의 전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소실점의 시간과 그 시간으로의 순례. 작중에서 꿋꿋이 주장하는 바대로, 기억을 지울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기에(김연수가 떠오르는 것은 정상이다). 이야기는 한 줄뿐인 목차로 수렴된다.



일본어


다자키 쓰쿠루에게 색채가 없는 것은 이름자에 색깔을 나타내는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완벽한 일체감을 안겨주던 5인의 그룹에서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는 그룹에서 영문도 모르고 쫓겨난 때부터 그 이유를 알게 된 16년 후까지 자신이 방출된 이유를 자신의 무색채에서 찾고 있었다. 그 후 순례의 시간동안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색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다시 만난 옛 친구들에게서 알게 된다. 언어가 규정한 사고 안에서 빙빙 돈 셈이다.

예를 들어 ‘아카’는 누군가에게 적갈일 수도 있고 새빨강일 수도 있다. 구체화된 언어를 통해 인간 개별자를 정의내리는 것은 항상 오류를 유발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오류를 유발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 <색채가…>는 그런 오류의 일본어 버전을 잘 드러내고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을 순례라는 이름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각자의 모국어로 사고한다.



클리셰


쓰쿠루는 기차역과 사랑에 빠졌고, 역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가만히 역을 바라보고, 드나는 열차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대학교 후배이자 룸메이트인 하이다는 쓰쿠루의 꿈과 현실의 경계에 나타나 그의 성기를 빨았다. 시로를 제외한 그룹의 나머지들은 그녀를 각기 다른 피아노 연주곡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상의 요소들은 하루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단단하다’는 느낌과 ‘진부하다’는 느낌을 동시에 주는 소재들이다. 문학은 말하기보다 보여주어야 하고, 관습적 보여주기는 말하기에 가까워진다.



섹스


누군가 카뮈, 하루키, 김훈을 이렇게 비교했다. ‘카뮈는 냉소하고, 하루키는 섹스하고, 김훈은 밥벌이를 한다’. 분명 하루키는 조소에도 노동생활에도 사로잡힌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경우의 논의도 유효한 것이다. 물론 조소도 없고 노동생활도 없이 섹스만 남은 이야기에 젊은 정신들의 SNS가 장악당하는 것은 병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쪼록 단단하고 흡인력 있는 작품이고 작가이므로 여기에 지나치게 침잠하지 않는 것을 권한다.

by 시적 화자 2013. 10. 21. 11:31

          바벨 이전의 언어

 

인간이 바벨탑을 지어 신에게 도전하려다 벌을 받기 전에는, 언어란 본유적인 것이었다. 기표와 기의가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도 존재에는 이름이 있었다. 누구나 서로 관념을 지시할 수 있었다. 언어가 어쩌다 분화되었는지는 큰 의미가 없다. 성경은 단지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온전한 언어를 전제하여 언어의 특성과 사명을 특유의 알레고리를 통해 넌지시 은유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는 자의적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등장하는 정령처럼. 말할 수 있는 자는 말을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언어의 힘을 빌려 말 못하는 자를 대신해 말해주어야 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발화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벨탑 이야기가 주장하는 바이다.


 


          생태민주적 물음

 

말 못하는 것들을 대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언론에 다가갈 수 없는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를 대변해주는 것일 수도 있고,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이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은 말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정유정 작가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소재를 통해 말 못하는 개들과 말할 줄 아는 인간들의 운명을 한데 묶어 던져버린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이 중엔 개의 시점도 있다. 수백 마리의 동족을 구덩이에 파묻는 모습을 지켜보는 개의 감정도 묘사한다. 인간 시점에서 묘사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이야기들과 교차를 이룬다. 개들은 구덩이에 파묻히고, 아무튼 사람이 먼저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들을 전부 매장시킨 뒤엔 병에 걸린 인간들이 파묻힌다. 배려할 대상의 기준으로서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경계는 얄팍한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꼬리를 자르다 보면, 결국 인간성의 범주는 인간 스스로를 옥죈다는 것이다. 굳이 인수공통 전염병이 없더라도, 궁극적으로 인간은 다른 생물종과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생태민주주의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존중하고 대변해야 하는가. 모든 생물권에 권익을 보장해주자는 요지의 생태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있다. 다음은 네이버 지식인 발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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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론적 의미과 민주주의의 합성된 단어입니다.

 

생태주의는 사회나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봅니다..그래서 어느 한 부분이

파괴당하면 전체가 제 기능을 할수 없죠. 따라서 각 부분이 의미를 지니며

특히 상호보완과 긴밀한 협조를 중요시하죠..

 

이에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사회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가정하고

개별 구성원의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해 관심을 두고,

모든 구성원의 번영과 상호커뮤니케이션에 중점을 두는 사회이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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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태민주주의의 늪에는 바닥이 없다. 태아도, 개도, 닭도, 식물도. 심지어 플랑크톤에게도 권리를 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물권의 배제를 야기한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다. <28>의 정유정 작가도 생태민주적인 물음을 던졌을 뿐, 작품을 통해 생태민주주의 자체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념을 넘어 존재로

 

막다른 길에서 우리는 실존적 의미로 뛰어넘어야 한다. 개체는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고, 의도대로 조작할 수도 없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도 그렇고, 인류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은, 개인은, 다른 생물종과 운명을 공유하는 상태로 던져진 채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권위를 벗고, 극단을 경계하고, 현상을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관리자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단지 언어와 지성의 혜택을 누리고 그것을 세계에 환원하는 대변인일 뿐이라야 한다.

by 시적 화자 2013. 9. 11. 13:53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작은 지역 라다크. 저자는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지혜를 통해 천년이 넘도록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온 라다크가 서구식 개발 속에서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사회적, 생태적 재앙에 직면한 우리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은 개발 이전의 라다크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이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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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네이버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예전 모 대학 논술 지문으로 이 책의 논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라는 문제가 있었음.

책의 주지는 라다크에서 천년 넘게 지속되던 생활양식이 그들의 과거이고 우리의 미래다! 오래된 미래다! 가져다 쓰자! 이런건데

환경문제를 생활양식의 관점에서 들어간 건 좋은 접근이지만, 환경문제에는 단순한 회귀가 없다(그때 같이나온 지문이 열역학제2법칙이었던 걸로 기억)는 것이다

by 시적 화자 2013. 8. 28. 14:47

 13년도에 등단한 한 시인분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내 시를 평가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민망하고 무례한 부탁이었지만, 그 시인분은 그래도 선선히 응해주셨고 곧 이메일로 나의 시 세 편과 그분의 비평문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보내드린 시들 중 <마당>이라는 시가 있었는데, 그 시에 대한 그분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가족 이야기는 2000년도 이후 워낙 진부해진 소재라, 가족을 말하려면 좀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합니다.'

 

 그 시인분의 말대로, 이미 '가족'에게는 수많은 변호사가 있다. 그래서 가족과 관련된 문제들에는 그 수 만큼의 변론이 있다. <마당>은 그런 변론들 중 아주 흔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두근두근 내 인생>을 만났다. <달려라 아비>에서부터 작가는 '가족'을 대변하는 데 탁월했다.

 심리학 용어로 '검은 양 효과'라는 게 있다고 한다. 문제가 생긴 집단에서 한 구성원이 문제의 모든 원인이 되는 '검은 양'의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구성원들은 집단과 자신의 정당함을 말하기 위해 모든 원인을 검은 양에게서 찾기 시작한다. 이 경우 누구도 가족 전체를 대변해주지 않는다. 구성원 사이에 선천적인 질환 따위로 검은 양이 점지되는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누가 이들을 설명해줄 것인가? 작가는 가족의 탄생부터 시작된 운명을 담담히 보여줌으로써 가족과 구성원 모두를 끌어안는다.

 

 그간 나는 작가의 다른 단편들을 읽고, 시선이 너무 히스테릭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을 통해 나는 작가의 통찰이 사실 그 히스테리들을 포섭하고 있었다고 여기게 되었다. 다음에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끌어안아줄지 기대된다.

 

-참고 출처.

  네이버 검색

  만화 <닥터 프로스트>

by 시적 화자 2013. 7. 2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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