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이전의 언어
인간이 바벨탑을 지어 신에게 도전하려다 벌을 받기 전에는, 언어란 본유적인 것이었다. 기표와 기의가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도 존재에는 이름이 있었다. 누구나 서로 관념을 지시할 수 있었다. 언어가 어쩌다 분화되었는지는 큰 의미가 없다. 성경은 단지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온전한 언어를 전제하여 언어의 특성과 사명을 특유의 알레고리를 통해 넌지시 은유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는 자의적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등장하는 정령처럼. 말할 수 있는 자는 말을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언어의 힘을 빌려 말 못하는 자를 대신해 말해주어야 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발화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벨탑 이야기가 주장하는 바이다.
생태민주적 물음
말 못하는 것들을 대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언론에 다가갈 수 없는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를 대변해주는 것일 수도 있고,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이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은 말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정유정 작가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소재를 통해 말 못하는 개들과 말할 줄 아는 인간들의 운명을 한데 묶어 던져버린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이 중엔 개의 시점도 있다. 수백 마리의 동족을 구덩이에 파묻는 모습을 지켜보는 개의 감정도 묘사한다. 인간 시점에서 묘사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이야기들과 교차를 이룬다. 개들은 구덩이에 파묻히고, 아무튼 사람이 먼저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들을 전부 매장시킨 뒤엔 병에 걸린 인간들이 파묻힌다. 배려할 대상의 기준으로서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경계는 얄팍한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꼬리를 자르다 보면, 결국 인간성의 범주는 인간 스스로를 옥죈다는 것이다. 굳이 인수공통 전염병이 없더라도, 궁극적으로 인간은 다른 생물종과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생태민주주의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존중하고 대변해야 하는가. 모든 생물권에 권익을 보장해주자는 요지의 생태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있다. 다음은 네이버 지식인 발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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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론적 의미과 민주주의의 합성된 단어입니다.
생태주의는 사회나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봅니다..그래서 어느 한 부분이
파괴당하면 전체가 제 기능을 할수 없죠. 따라서 각 부분이 의미를 지니며
특히 상호보완과 긴밀한 협조를 중요시하죠..
이에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사회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가정하고
개별 구성원의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해 관심을 두고,
모든 구성원의 번영과 상호커뮤니케이션에 중점을 두는 사회이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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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태민주주의의 늪에는 바닥이 없다. 태아도, 개도, 닭도, 식물도. 심지어 플랑크톤에게도 권리를 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물권의 배제를 야기한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다. <28>의 정유정 작가도 생태민주적인 물음을 던졌을 뿐, 작품을 통해 생태민주주의 자체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념을 넘어 존재로
막다른 길에서 우리는 실존적 의미로 뛰어넘어야 한다. 개체는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고, 의도대로 조작할 수도 없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도 그렇고, 인류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은, 개인은, 다른 생물종과 운명을 공유하는 상태로 던져진 채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권위를 벗고, 극단을 경계하고, 현상을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관리자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단지 언어와 지성의 혜택을 누리고 그것을 세계에 환원하는 대변인일 뿐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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